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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누레터: 체코 프라하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

난 여기까지인지도 몰라. 어쩌면 다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몰라. 인천을 출발해서 경유지 헬싱키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몇 번이고 되뇌었다. 내가 맡은 역할과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의 무게에 하루하루 짓눌리는 것 같았던, 새벽마다 잠에서 깨어나서 가슴을 치던 때였다. 더 이상 몸과 마음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서 2주 긴 휴가를 내고 여행길에 올랐다. 일단 일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고, 휴가 이후에 어떻게 다시 해낼 수 있을지는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소령님이 휴가 전날 선물로 준 김연수 여행 산문집 『언젠가, 아마도』를 비행기에서 읽었다.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사라지는 방법’이라는, 시선을 확 잡아끄는 제목을 가진 글이 실려 있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한국에서 가장 완벽하게 잠적하는 방법은 남아공 동쪽에 위치한 드라켄즈버그 산맥을 넘어 레소토로 들어가는 것이라던데, 나도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하지만 글에서 묘사하는 레소토의 끔찍한 전통 맥주를 견딜 자신이 없었기에 금방 마음을 접었다. (한 대접으로 여러 사람이 나눠 마시는 맥주라니, 무슨 사발식도 아니고.)
여행을 떠났다고 해서 특별한 일이 생길 리는 없었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시내로 가는 기차를 타는 설레는 순간에도, 사진으로만 보던 명소에서 한껏 들뜬 관광객들의 인파 속에 있어도, 아침마다 배가 터지도록 조식 뷔페를 먹어도 마찬가지. 문득문득 ‘어쩌면 다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몰라’라는 문장이 머릿속을 스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여행지에서 깨달음을 얻어 모든 번민에서 자유로워지길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질 줄 알았는데.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토요일에만 열린다는 파머스 마켓을 찾아 실컷 구경을 하고,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노래하는 뮤지션들의 거리 공연을 보고, 예술가들이 묻혀 있다는 공동묘지를 한 바퀴 걷고, 관광객들과 상인들로 북적이는 다리 앞을 지나왔다. 이보다 알찰 수 없는 일정이었지만 마음이 산뜻해지기는커녕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추운 날씨에 지쳐서 얼른 숙소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숙소 근처까지 오니 배가 고팠다. 힘들수록 잘 먹어야지. 구글맵 방문자 평가가 꽤 좋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스테이크를 시켜 먹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둘씩 혹은 단체로 온 손님들로 가득했다. 동행인과 함께 맛있는 음식에 함께 감탄하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인데, 나는 혼자 여행하고 있으니 그런 기분을 낼 수도 없었다. 이렇게 적적할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예상하고 온 여행이었지만, 그것도 엿새째가 되니 슬슬 버거워지고 있었다.

저녁을 다 먹고 나왔는데 아까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다. 1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식사 시간이었는데,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세상이 달라진 것은, 기나긴 고독의 시간을 지나온 내게 돈오점수와 같은 커다란 깨우침이 찾아왔기 때문…일 리 만무하고, 경쾌한 음악과 함께 수많은 사람이 내는 함성과 박수 소리가 거리에 울려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이날은 RunCzech라는 러닝 행사가 열리는 날이었고, 내가 묵는 숙소 앞 광장이 결승 지점이었다. 식당에서 나왔을 때는 마침 여성 5km 달리기에 참여한 주자들이 줄을 이어 결승점에 들어오고 있었다. 풀코스 마라톤도 아니고 고작(이라고 말해서 죄송합니다 참가자 여러분) 5km 달리기일 뿐인데, 현장 분위기는 올림픽 못지 않았다. 원래는 곧바로 숙소에 들어갈 생각이었지만, 여행지에서는 뭐라도 볼 거리가 있으면 일단 보는 게 남는 거라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펜스 앞에 서니 결승점으로 달려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잘 보였다. 마라톤 대회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탄탄한 몸과 강철 같은 장딴지 근육을 가진 철인들 대신, 동네에서 흔히 봤을 친근한(?) 몸매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철인들은 5km 말고 풀코스 뛰러 갔겠지!) 대부분은 2,30대로 보였지만 우리 어머니 뻘 되는 어르신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그런 이들이 굉장히 힘들어 보이는 표정으로, 앞으로 무너질 것 같은 자세로, 걷는 것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뛰어오고 있었다.
긴박감이 넘치는 대회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코스 한복판에 서있는 장내 아나운서는 한 손에 마이크를 잡고 쉴 새 없이 떠들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주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괜히 나까지 들뜬 기분이 되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혼자라는 생각에 적적해 하던 내가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힘내라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광장에 모인 수많은 관객들도 마찬가지로 생전 본 적 없는, 앞으로도 마주칠 일이 없을 사람들에게 응원을 보내고 있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세상이 조금은 더 살 만한 곳으로 느껴졌다. 이렇게 아무 조건 없이 서로에게 힘을 주는 세상이라면 혼자라고 쓸쓸해 할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여행을 마치고 나는 남아공 동쪽에 위치한 드라켄즈버그 산맥을 넘어 레소토로 들어가는 대신 서울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오랫동안 쉬던 달리기를 다시 시작했고, 새벽에 잠에서 깨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짓눌리는 것 같았던 업무들도 하나씩 처리했다. 내가 처리하기 어려운 일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미루거나 (동료 여러분 미안) 미련 없이내려 놓았는데, 그래도 큰일은 생기지 않았다. 휴가 가기 전에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도 2019년 한 해가 별 탈 없이 지나갔는데, 어쩌면 그건 이날의 박수와 함성 덕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체코 프라하를 생각하면 아름다운 야경이나 웅장한 프라하성이 아닌, 달리기와 박수와 환호성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2020년 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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