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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We’re Reading #225 케냐 마라토너들은 천천히 뛴다. 나도 그렇다.

퍼블리 콘텐츠 <케냐 마라토너들은 천천히 뛴다> 본문 이미지

석 달 전인 9월 중순에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1주일에 네 번 정도 달리기를 하는데, 주말에는 한강공원 양화지구를, 평일에는 서울숲을 달립니다. 오늘도 아침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매고 달리고 오는 길입니다.

달리기를 시작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습니다. (운동이란 모름지기 한두 가지 이유만으로는 시작하기 어려운 법이니까요.) 여름 내내 병치레를 하느라 몸이 축나 있던 때라서 건강을 챙겨야겠다고도 생각했고, 올해 부쩍 불어난 체중을 줄여야겠다는 다짐도 했고, ‘움직이는 명상’이라 불리는 달리기가 스트레스 조절에 도움을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했습니다. 지인들이 소셜미디어에 종종 올리는 달리기 이야기도 자극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제가 하필이면 9월 중순에, 다급하게, 달리기를 시작할 정도로 결정적인 계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그야말로 ‘지금이 아니면 안 돼!’ 하는 마음이었으니까요. 그때 반드시 시작해야만 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날씨가 너무 좋아서.

사계절이 뚜렷한 한반도는 계절마다 제철 위험 요소도 뚜렷합니다. 봄에는 황사, 여름에는 더위와 습기, 겨울에는 추위와 빙판길까지.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으면 이런 걱정을 안 해도 되었을 텐데요. 9월 중순, 다시 말해 초가을은 이 모든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짧은 시기입니다. 달리지 않기에는 호시절이 너무나도 아까우니 운동화 끈을 동여매고 나가는 수밖에요. ‘추워지기 전까지 딱 한 달 반만 달리자. 그리고는 다시 내년 9월을 기약하자’. 가을을 맞이하는 저의 마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온 힘을 다해 달렸습니다. 제가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달리다가 숨이 차면 걷고, 호흡이 진정되면 다시 달리고, 힘들면 다시 걷고. 아무리 좋게 포장하려 해도 도저히 인터벌 달리기라고는 말할 수 없는 이런 운동을 아침에 하고 나면 종일 머리가 깨질 듯 아팠습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속도를 줄여서 천천히 뛰었지만, 그래도 두통은 여전했습니다. 

인터넷을 열심히 뒤져 보니 이런 ‘운동성 두통’은 원인을 특정하긴 어렵고, 산소 공급이 원활하지 못한 것이 한 가지 원인일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호흡 방식을 바꾸면 도움이 될까 싶어서 처음에는 입으로 호흡했다가, 하루는 코로 마시고 입으로 내뱉었다가, 하루는 코로만 호흡했다가… 그래도 안 돼서 어깨의 긴장도 풀어 봤다가, 목의 자세도 바꿔 봤다가… 다양한 시도를 했으나 모두 허사였습니다.

달리는 날마다 두통에 시달렸지만 그만둘 수는 없었습니다. 1년에 한 달 남짓밖에 없는 호시절을 고작 두통 때문에 날리면 억울하니까요. 그렇게 한 달 정도 달리고 나니 어느 날부터 신기하게 두통이 사라졌습니다. 몸이 달리기에 적응했나 봅니다. 

달력은 벌써 11월. 아침에 달리기를 할 때면 볼과 귀가 시리기 시작했습니다. 초가을이 끝나고 만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헤어지는 마음이야 아쉬웁지만…) 이제야 달리기에 몸이 적응했는데 벌써 초가을이 끝나다니. 그렇게 생각하니, 달리기를 그만두기 아쉬워졌습니다.

결국 저는 ‘딱 한 달 반만 해 보자’라는 초심을 잃고는, 추위를 이겨낼 방한용품을 그러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보온 소재 운동복, 바라클라바(눈을 제외한 얼굴 전체를 가리는 방한모) 겸용 넥워머, 모자, 장갑 등등. 덕분에 영하 10도의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리고 있습니다. 눈이 내리고 길이 빙판이 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있지만, 그때는 또 다른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겠죠.

달리기를 하고 싶어서 제가 날씨 걱정까지 할 줄은 전에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렇게 (일 외에) 뭔가를 간절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 마지막으로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저는 달리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아직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는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준비운동을 하고 운동복을 챙겨입는 시간이 하루 중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입니다.

올겨울 저의 달리기 좌우명은 ‘욕심내지 말자’입니다. 재작년에 발행된 퍼블리 콘텐츠 <케냐 마라토너들은 천천히 뛴다>에서 케냐 마라토너들은 (제목에서처럼) 아침저녁으로 느리게 달린다는 이야기를 감명 깊게 읽었기 때문인데요. 이 좋은 달리기를 부상 없이 오래오래 즐기려면 욕심내지 말고 천천히 달려야지, 하는 다짐을 마음 깊이 새기기 위해 다시 한번 콘텐츠를 열었습니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Pole, pole 천천히, 천천히
이텐의 케냐 마라토너들이 아침과 저녁에 5~6min/km의 속도로 천천히 뛴다는 사실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국가 대표 선수들도 그럴 줄은 몰랐다.
(중략) 천천히 시작한 조깅은 아주 조금씩 속도가 붙었지만, 5min/km보다 빠르게 달리지는 않았다. 달리는 내내 헬라, 에드나, 자넷은 스와힐리어로 서로 농담을 주고받고 웃으며 뛰었다. 나는 이때가 기회다 싶어 데이비드에게 왜 이렇게 천천히 달리냐고 물어보았다.”

(‘케냐 마라토너의 마음가짐’ 챕터 중에서. 굵은 글씨 강조 표시는 제가 했습니다)

음…… 역시 마라톤의 성지 케냐는 뭔가 달라도 다릅니다. 저는 5min/km의 속도로 5분만 뛰면 농담은커녕 숨이 턱까지 차올라서 ‘나는 왜 심장이 하나뿐인가’ 하는 진화론적 고민에 빠지게 되던데 말이죠. 어쩐지 저자 김성우 님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케냐 마라토너들은 천천히 뜁니다. 하지만 민우님보다는 빠르죠.” 

그래도 괜찮습니다. 부상이나 통증 없이 어제도 오늘도 달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저는 즐거우니까요. 일주일에 네 번 달리는 사람이 된 기분을 만끽하고 있으니까요. 작심삼일하지 않고 오랜 시간 몰입할 대상을 찾은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으니까요. 그러니 서울숲과 한강공원에서 새파란 복면을 뒤집어쓰고 달리는 사람을 목격하신다면, 국번없이 111을 누르기보다는 응원하는 눈길로 바라봐 주세요.

2019년 12월 13일 금요일
김민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