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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하게 원했던 정직원 전환, 탈락 후 100개월

대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방학에 인턴(2개월 프로젝트를 한 뒤 정직원 전환 심사를 하는)으로 들어갔던 회사는 여러 모로 훌륭한 직장이었습니다. 세계 1위로 승승장구하는 기업이라 그런지 ‘우리 회사는 정말 똑똑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거나 ‘우리 회사 제품이 세계 최고’와 같은 자부심을 직원들에게서 볼 수 있었습니다. 회사 내부망에는 세계 방방곡곡의 베스트 케이스를 모은 교육 자료들이 넘쳐났고,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빠르게 승진할 수 있는 기회, 그리고 해외에서 더 큰 시장을 대상으로 큰 역할을 맡을 기회도 열려 있었습니다. 그 회사, 그 팀 출신들이 다른 기업에 직급을 몇 단계나 올려서 이직해서 맹활약하고 있다는 말은 더더욱 저의 기대를 부풀렸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인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그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곳에서 일하기만 하면 많은 것을 배우고, 세계를 무대로 일해서, 아주 뛰어난 역량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제가 바라던 커리어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요. 아등바등 살고 싶지 않아서 항상 ‘안정지원’과 ‘하향지원’을 신조로 삼았던 저였기 때문에, 어딘가에 합격하기를 그렇게 간절히 원했던 것은 그때가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렇지만 2개월이 끝나고 받은 결과는 (깔끔한) 탈락이었습니다.

인턴 근무를 마무리하는 날인 2월 28일은 저의 대학교 졸업식 날이었습니다. 휴학도 하고, 군대도 다녀오고, 초과학기도 하면서 8년 동안 다닌 정든 학교였습니다. 부모님의 축하도 받고, 친구들과 사진도 찍고, 학사모도 던져 보고, 맛있는 음식도 먹으면서 학교를 떠나는 아쉬움의 정취에 흠뻑 젖을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날은 인턴 프로젝트 결과를 매니저들 앞에서 발표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졸업식은 오후, 발표는 오전이라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정해진 발표 시간은 1시간. 고민이 컸습니다. 두 달 동안 프로젝트를 하며 만들어낸 수많은 성과를 1시간 안에 요약해서 모두 전달하는 것이 고민…이었다면 정말 행복했겠지만, 실상은 두 달 동안 각종 데이터와 문서를 디립다 팠지만 쓸모 있는 결론을 도출하지 못해서 1시간 동안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고민이었습니다. 밤을 새우며 발표를 준비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발표할 꺼리가 없어서 그냥 포기하고 담당 매니저에게 ‘못하겠어요’ 하고 문자를 보내고 잠이나 푹 잘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도망친 놈’으로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어떻게든 꾸역꾸역 준비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그날 새벽에 포기했으면 저는 저대로 잠을 푹 자서 상쾌한 컨디션으로 졸업식에 참여하고, 매니저들은 매니저들대로 피같은 시간을 아끼고, 회사는 회사대로 매니저 여러 사람의 시간을 아끼니까 비용을 절감하는, 공리주의적으로 완벽한 결과가 나왔을 것 같습니다. 제가 괜한 짓을 해서…

다국적기업 답게 인턴 발표 역시 영어로 진행되었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발표 슬라이드를 보며 1시간 동안 아무말 대잔치를 하고 나왔는데, (한국어로 발표했으면 정말 민망했을 것 같은데, 영어로 하니까 왠지모르게 용감해져서 떳떳하게 아무말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담당 매니저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민우님은 프로젝트에 관련해서 정말 스터디를 많이 했는데, 그걸 절반도 못 보여준 것 같아요.” 다섯 글자로 요약하면 “너 못했어요”라는 말이었습니다.

탈락을 확정짓는 전화를 받은 건 그로부터 1주일 뒤였습니다. ‘합격할 리가 없지만, 두 달 동안 수고했으니 여행을 가자’ 하고 땡처리 항공권을 사서 태국으로 여행을 가던 길이었습니다. 수완나품 공항에 도착해서 입국심사장으로 걸어가던 중에 담당 매니저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았고, 정직원으로 전환하지 않기로 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매니저로부터 받았던 피드백이 “민우님은 학자 타입인 것 같아요”였습니다. ‘너는 데이터는 열심히 보았지만 비즈니스적으로 도움이 되는 통찰은 해내지 못했다. 그냥 공부 하는 게 어떻겠니?’라는 이야기를 돌려서 한 것이었겠죠. 

합격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간절히 원하던 곳에서) 실제로 탈락 통보를 받는 건 또 다른 얘기라 그 좋은 방콕에서 2일 정도는 나라를 잃은 사람처럼 지냈습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 같던 미래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 같은 기분이라서요. 물론 돈이 아까워서 나머지 3일은 정신 차리고 미친 듯이 돌아다니며 먹고 마셨지만요. 

그게 2011년 2월이었으니 그로부터 100개월이 지났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습니다. 제 미래는 사라지지 않았고, 커리어 기회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좋은 사람들도 여럿 만났습니다. 100개월 전에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지만, 100개월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재미있는 인생입니다. 전지전능한 존재가 제 앞에 나타나서 ‘지금 인생을 계속 살겠니, 아니면 그 회사에 합격시켜 줄 테니 100개월 전으로 다시 돌아가겠니?’ 하고 물어본다면 한치도 망설이지 않고 ‘살던 대로 살래’라고 대답할 겁니다.

이 때를 떠올릴 때면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일이 막 벌어졌을 때는 아주 나쁜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도, 사실은 그렇게 나쁜 일이 아닐 수도 있다고. 반대로 아주 좋은 일로 보이는 일 역시, 사실은 그렇게 좋은 일이 아닐 수 있다고. 이런 생각 덕분인지 (누가 죽거나 크게 다치는 일을 제외하면) 크게 슬퍼하거나 낙담하지 않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궁극의 정신승리 기술을 마스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글 왜 썼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