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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길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일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길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그로스’ 업무를 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좀더 강하게 가지고 있던 시기의 저는 팀이 성장 실험을 활발하게 수행할 때 가장 즐거웠습니다.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계획하고, 실행해서 결과를 확인하고, 대부분의 실험은 기대했던 결과를 내지 못하지만 일부 실험에서는 좋은 결과가 나왔을 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간다는 생각이 들 때 즐거웠습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폴 그레이엄 선생님은 ‘스타트업=성장’이라 가르치고, 세계 곳곳의 가장 일 잘하는 사람들은 1주일에 실험을 10개씩 하라고 가르치고, 스타트업이 큰 조직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빠른 속도밖에 없다고 가르칩니다. 선생님 말 잘 듣는 착한 학생인 저는 몇 년에 걸쳐 그런 가르침을 차곡차곡 내면화했습니다. 얼마나 잘 내면화했냐 하면, ‘데이터 분석가’가 아니라 ‘그로스 매니저’로 일하는 것이 저에게 가장 좋은 커리어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성장 실험이라는 것은 무한정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디자인을 하고 프로그래밍을 해서 실험을 구현할 사람들이 필요하고, 이해관계자들의 협조도 필요하고, 실험을 실행할 수 있는 기술적인 기반도 갖춰야 합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사람이 필요하고, 또 사람이 필요하고, 또 의지와 능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일을 하다 보면 그런 시기가 옵니다.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은 눈앞에 빤히 보이는데, 그걸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부족해서 아무 것도 못하는 기분이 드는 그런 시기. 그런 시기가 되면 눈앞에 불이 활활 타고 있는데 소화기는커녕 500미리 생수병도 없어서 아무 것도 못 하고 가재도구가 타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물론 저도 함께 불에 타거나, 연기에 질식하거나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일어나겠다는 예감이 듭니다. 

채용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시기를 어찌나 기가 막히게 잘 알던지. 링크드인이든 메일이든 가리지 않고 연락을 해 옵니다. ‘우리는 유명한 VC로부터 투자를 받았고, 엄청나게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뛰어난 사람들이 일하고 있으니, 네가 오면 정말 재미있게 일할 수 있을 걸?’ 하고 말하면, 솔깃합니다. 그런 회사는 마치 채광도 좋고, 환기도 잘 되고, 층간소음도 없고, 지하철 역도 가깝고, 집 근처는 조용하지만 조금만 걸어나가면 대형마트에서부터 공원과 코워킹 스페이스, 그리고 빵집과 빵집과 또 빵집이 넘쳐나는 집 매물과도 같습니다. 그런 매물이 나타나면 혹시나 다른 사람에게 선수를 빼앗길까 당장 계약금을 내고 싶어하는 저로서는, 그런 제안(부동산 말고 리크루팅 얘기입니다)에 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리크루팅의 제1 원칙은 ‘채용 대상자가 회사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불만을 파악한다. 그리고 그 불만을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한다’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즐거움이 거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이죠. ‘직업인’으로서는 ‘멈춰 있다’ 내지는 ‘공회전 하고 있다’라는 좌절감을 느끼는 시기라 하더라도, 내가 마음 속 깊이 믿는 미션을 목표로 하고, 세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업을 하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니까요. 그런데 이건 유명한 VC로부터 투자를 받고 엄청나게 빠르게 성장하면서 뛰어난 사람들이 드글대는 회사를 찾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팀과 사업을 만나는 일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지리산 일출을 보는 일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팀에서 일하고 있으면, ‘멈춰 있다’라는 기분이 들고, ‘그로스’ 업무를 하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못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미션과 비전이 좋고 팀이 좋다면, 언젠가는 좋은 사람들을 (충분히 많은 사람은 아니더라도 – 사실 어느 회사든 충분히 많은 사람이 있는 게 가능한 일이 아니지만) 채용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당장은 힘들고 초조하지만 존버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존버는 무슨, 빨리 다른 좋은 회사 찾아서 떠나겠죠. 되돌아 보면 지금까지 했던 이직 모두 그런 이유에서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어쩌면, 저에게 버티는 힘, 혹은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가장 큰 즐거움은 ‘직업인’으로서의 만족도보다는 다른 데서 오는 것 같습니다.